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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은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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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대한 간략한 소개 여러 주제에 대한 짧은 저자의 생각들이 담겨있다. 살아가면서 한번 쯤 생각해볼만한 것들에 대한 것들에 대한 저자가 내린 정의나, 생각을 엿볼 수 있음.

한 사람의 도덕성은 그가 무엇을 싫어하는지에서, 창의성은 그가 무엇을 좋아하는지에서 드러난다.

사랑에 관하여

사랑은 분명 호감의 일종이다. 호감 중에서도 아주 집중된 호감.

어떤 이가 눈 앞에 있을 땐 좋지만 없을 때는 관심 밖이라면 사랑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사랑은 상대가 내 눈 앞에 없어도 나를 들뜨게하고, 한숨짓게 할 정도의 집중성을 갖는 감정이라서 사랑을 골고루 나눈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사랑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아마도 상대를 나만큼, 혹은 나 자신보다도 더 위하는 마음. 그래서 사랑은 인간을 숭고하게 만들기도 한다.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이기심을 벗어나는 경험을 하게 만드니까.

’받는 사랑’도 ‘주는 사랑’ 못지않게 중요하다. 받지 못하는 사랑은 실패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의 완성은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상대로부터 나도 소중한 존재로 여겨질 때 이루어진다.

나의 실존을 상대와 공유하고 싶다는 느낌에 이를 때 비로소 사랑의 감정이 생겼다고 할 수 있다. 사랑은 상대의 미력을 일시적으로 사용하거나 또는 어떤 목적 달성을 위해 호흡이 잘 맞는 상대와 일시적으로 연대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이러한 관심의 집중성은 어디서 오는걸까?

관심의 집중은 어떠한 ‘결여’와 관련되어있다. 우리에게 없는 것, 얻기 어려운 것에 관심이 집중된다. 그ㄴ데 만일 이러한 관심과 가치의 집중이 어떤 결여의 상태와 관계된다면, 사람은 결여의 상태에서만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인가? 원하는 것을 모두 다 할 수 있는 상황에서 사람은 행복하기 쉽지 않다는 건 분명 사실인 것 같다.

예의에 관하여

예의는 관계와 상황에 따라 다른 역할 기대에 맞는 행위양식을 말한다.

예의가 아름답게 보일 때가 있다. 그것은 서로의 역할 기대에 대해 그에 따라 행동할 때이다. 반면 예의가 족쇄처럼 보일 때도 있는데, 그건 내가 동의할 수없는 역할 기대를 하고, 그에 맞게 행동하길 요구할 때이다.

많은 경우 예의를 파괴하는 것 자체가 혁신의 시작이었다. 어법, 인사 방식, 복장을 달리하는 것이 자극적인 이유는 단지 패션의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예의 없이는 자유로운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를 지켜가기가 불가능하다.

타인 존중

윤리학자들에게 타인 존중의 필요성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과제다. 존중의 필요성이 정당화된다고 해서 윤리적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존중의 방식을 결정하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흔히 인간은 근본적으로 이기적이기에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것은 당연하고, 다만 어떻게 타인을 존중하게 되는 가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한다고 간주된다. 그러나 발생적으로보면 자기존중보다 타인존중이 먼저다. 아이들의 도덕적 능력의 발달 과정을 보면 자기 자신을 존중한 후 타인을 존중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주변의 어떤 인물을 존중하는 것을 먼저 배운다. 그 다음에 자신을 그들과 다르지 않은 존재로 인식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존중감을 갖게 된다. 반대로 자신이 존중하는 사람과 자신을 대등한 존재로 동일시하는 데 성공하지 못하면 자기존중감을 갖는 데 실패한다.

-> 어려서 누군가를 존중하는 경험을 하지 못하거나, 그럴 만한 사람이 없다면 자기존중감을 가질 기회마저 없게 되는 것이구나, 자기존중감이 사람의 이기심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존중감에서 시작한다는 점이 매우 인상깊었다.

위로에 대하여

인간적인 성숙의 기준은 무엇일까?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 위로를 줄 수 있는 능력아닐까? 그러나 이런 성숙함의 기준은 거의 비현실적이다. 그것은 어릴 적 한없는 보살핌을 주었던 사람에 대한 기억이 작용하여 성립된 상상적 기준일 뿐, 실제 다른 사람들과의 경험에서 나온 기준이 아니다.

위로의 갈구는 종종 바로 그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사람이나 상황에서 배반당한다. 위로받을 필요는 절실하지만 위로를 주는 것은 그런 절실한 필요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위로를 주고받는 것은 거의 언제나 어긋나게 되어있다. 위로를 찾는 나의 목소리, 눈빛은 상대의 무관심에 부딪히고, 내가 가장 약한 모습을 보였을 대 받은 상처는 오래 기억된다. 그런 기억은 마음속에 일종의 복수심으로 자리잡아, 타인이 나에게서 위안을 구할 때 야멸차게 대하려 한다.

-> 어렸을 적 부모가 주는 무한한 애정과 사랑에서 나는 보살핌. 위로를 기대하는 대상으로부터 본인도 모르게 그러한 무조건적인 보살핌을 바라게 된다는 것

-> '위로에 대하여' 부분은 내가 위로받길 기대하는 대상에게서 위로받지 못했을 때 느꼈던 어떠한 상실감을 느끼고도 왜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 알지 못했을 때 읽게 되었던 부분이다. 본인의 약점을 보여주었다고 해서, 상대가 꼭 위로를 해야할 의무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위로 받길 기대하는 기대감이 좌절되었을 때의 감정은 꽤나 힘들다.

개성에 관하여

개성은 한 사람의 독특성이다. 독특성은 뛰어남과 다르다. 그 사람 식으로 언제나 틀리는 것도 개성일 수 있다. 남들이 하는 것을 안하는 것만으로는 개성이 성립되지 않는다.

개성을 가지려면 남들이 안 하는 것 중에 한 가지를 할 용기가 있어야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의 집중, 그 것이 개성을 만드는 가장 중요한 원천이다.

성숙함에 관하여

성숙함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사회성원으로서 적절히 판단하고 처신할 능력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적절한 판단 능력이란 종합적인 것이다. 이 때의 판단은 보통 말하는 ‘사리판단’ = 삶의 맥락에서 적합한 대응 방식을 찾는 능력이다. 이를 위해선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포괄적이고 반성적인 사고를 하는 것 . - 행위와 사건들의 연관과 의미를 충분히 고려해 나의 행위를 조정해가는 것. 맥락을 보지 못하고 눈앞의 것에 급급하여 행동하거나 순간적인 감정에 따라 반응하는 것은 스스로 미성숙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시다.

다른 한 가지는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타인의 노고를 인정하고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몫을 부담하고자 하는 태도다. 사회적 협동으로부터 이익만 취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이를 유지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부담을 지는 것이다. 그런 깨달음은 사회적 삶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 그래서 타고난 천재는 있어도 날 때부터 성숙한 인간은 없다.

성숙의 실존적 의미에 대해

우리 삶에서 우연성과 유한성은 제거될 수 없다. - 그래서 우리 삶에서 불안은 불가피하다.

문제는 이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미성숙의 한 표시는 우연성과 유한성을 외면, 부정하는 것. - 그 너머에 있는 완전한 것을 찾는 것도 미성숙의 표현.

예의에 관하여

예의는 관계와 상황에 따라 다른 역할 기대에 맞는 행위양식을 말한다.

예의가 아름답게 보일 때가 있다. 그것은 서로의 역할 기대에 대해 그에 따라 행동할 때이다. 반면 예의가 족쇄처럼 보일 때도 있는데, 그건 내가 동의할 수없는 역할 기대를 하고, 그에 맞게 행동하길 요구할 때이다.

많은 경우 예의를 파괴하는 것 자체가 혁신의 시작이었다. 어법, 인사 방식, 복장을 달리하는 것이 자극적인 이유는 단지 패션의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예의 없이는 자유로운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를 지켜가기가 불가능하다.

신념에 관하여

과연 확고한 신념이 인생에서 중요한 것일까? 위험성을 내포하지 않는가?

신념이란 증명되지 않은 부분이 있는 사실이나 가치, 원칙을 수용하는 결단이다. 따라서 완전히 증명된 것에 대한 믿음은 신념이 아니다. 그렇다고 어떤 것을 무조건 믿는 것과는 다르다. 증명하려는 노력없이 신념화된 믿음은 존경받기 어렵다.

신념 때문에 고통스럽더라도 신념은 내마음대로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신념의 주인이 아니다. 오히려 신념이 주인이다.

그러니 신념은 갖기도 어렵고 위험하기도 하다. 우리에게 확고한 기반을 심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찰과 고독, 희생을 감내하라고 요구한다.

친구

싫어함만 비슷하면 동지가, 좋아함만 비슷하면 동호인이 될 뿐이다.

사유와 외출

신체가 외출을 필요로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바깥 바람을 쐬지 않는 신체는 무기력하다. 우리의 사유도 외출을 필요로한다. 외출없는 사유는 실내에서 건조된 빨래처럼 눅눅하고 경쾌하지 못하다.

외출이란 새로운 자극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외출은 확장된 실내를 걷는 것과는 다르다. 외출이란 새로 돋아나는 식물도 보고, 언뜻 느껴지는 먼 향기를 느끼며, 혹은 불쾌한 일을 겪기도하는,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환경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누구에 의해서도 완전히 조작되지 않은 환경 속으로. (그래서 모험 동산에 들어가는 건 외출은 아니다.)

귀환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외출은 탈출도, 일탈도 아니다. 외출은 돌아오고싶은 마음이 있는 사람에게,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에게만 의미있는 행위다.

사유의 외출이란… ?

바깥으로 쏘다니는 사람은 오히려 사유할 여유가 없다. 끊임없이 자극에 노출된 사람은 사유할 수 없다. 사유는 돌아와서 자극을 되새기고 정리하면서 하는 것이다. 그런 시간을 갖지 않는 사람은 사유할 수없다. 그러 되새기고 정리해야할 자극이 없다면 내용있는 사유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사유의 외출이란 다른 생각, 새로운 경험, 낯선 스타일의 자극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이다.

사유의 외출을 강조하는 이유는, 우리의 사유가 의외로 수동적이며 창조적이지 않다는 판단 때문.

타인의 삶에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는가

내가 타인의 삶에 얼만큼 개입할 건지, 또 내 삶에 개입하는 타인을 얼마나 진지하게 대응할 것인지 명확히 정하기는 쉽지 않다.

제일먼저 고려할 사항은 내가 상대와 삶을 어느정도 공유하는 관계인가하는 점.

나와 삶을 깊이공유하지 않는 사람이 나의 행위에 관여하면 견딜 수 없는 노릇이다.

서로의 삶에 개입하는 것은 긴장을 불러일으키게 마련이다. 욕구, 정서, 판단이 언제나 같을 수 없는데 서로 개입하는 부분이 많다보면 갈등은 불가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