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비트겐슈타인
지적 인내심과 깊은 사유가 필요한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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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문제일수록 지적 인내심이 필요하다. 평소 깊이 읽기를 멀리한 사람들은 복잡한 문제도 무조건 빨리 해결하려고 달려든다. 예측 불허의 문제일수록 한 분야의 전문성만으로 쉽게 해결되지 않는데도 말이다. … 그러기 위해 끝까지 파고드는 ‘깊은 사유’가 절실하다. 그리고 오랜 시간 버틸 수 있는 ‘긴 사유’도 필수다.
⇒ 어떤 것도 편리하게 찾을 수 있는 요즘 ‘효율성’이 아주 높은 가치가 되어 ‘효율적이지 못한 행동’은 하지 않으려고 하게 된다. 텍스트를 읽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이슈가되는 많은 기사를 요약해서 매주 알려주는 ‘뉴스레터’ 붐도 일어났고, 이 또한 다 읽지 못한 사람을 위해 TL;DR을 써주는게 관행이 되기도 했다. 어떻게든 효율적으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함이다. 이런 모든 정보들에 대해 우리는 ‘깊은 사유’를 할 시간이 없다. (변명일 수도 있지만.) 수많은 Input input input… 사이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정보를 찾기만 해도 절반은 성공이다. 어쩌만 현대인들은 ‘선택적 깊은 사유’를 해야한다. 인터넷에 흘러가는 무수한 정보들에 대해 모두 ‘깊은 사유’를 할 수 없으며,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깊은 사유’라는 단어를 보고 떠올린 건, 최근 책을 읽으며 마음에 닿는 문장들을 만났을 때 생각에 잠기게 되는 것이 즐거웠는데, 디지털 매체(SNS, 뉴스레터, 아티클등…)에서 접한 문장들은 내가 깊은 사유를 하게끔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가끔 스크린샷을 하긴했지만… 어느새 까맣게 잊어버림). 이런 생각을 하며, 내가 왜 전자책보다 종이책이 더 좋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찾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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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은 3초마다 딴짓을 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디지털 중독인 사람들을 조사한 결과 생각을 담당하는 회백질의 크기가 줄었다고 한다.
⇒ 업무를 하면서 계속해서 집중하고 있지만, 집중을 못하는 상태를 느끼곤 한다. 최근 리드분께서 “A를 하면서 B를 생각하고, 이어서 CDE를지나 F를 하고 있는 자기자신을 발견한다”고 말했던 것에 매우 공감했고… 동시에 많은 일들을 처리하도록 요구되는 우리들은 성인 ADHD가 걸릴 위기에 놓여있지 않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디지털 매체에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주제에 대한 흥미로운 콘텐츠들을 마구 보여주고, 이것들에 익숙해진다면 오랜 시간 집중하는 힘도 있다가도 사라지기 쉬울 것 같다.
모국어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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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국어를 외면하면 자신이 진정으로 무엇을 욕망하는지 모른다.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언어가 현실에 안주하는 순간 … 지금 여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틀에 박힌다. 모국어의 위기는 곧 삶의 위기다. 왜냐하면 필연적으로 사고의 위기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 가슴에 박히는 문장이다,, 지금 내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들 중 총 사용되는 어휘는 과연 몇개나 될까? 나의 사전에 있는 어휘집 안에서 내 생각을 표현하고, 이해한다면 정말 그것이 나의 생각의 한계가 되고, 내 삶의 한계가 될 수 있겠구나 싶다. 모국어는 내가 가장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언어이고, 그것의 사용에 한계가 크다면, 결국 내 사고의 한계도 크게 되겠지. 물론 제2외국어, 영어를 어느정도 공부하고 사용할 수 있게되면, 이를 사용해 좀더 생각하고 표현하기 쉬운 경우들도 있기 마련이다.
디지털 매체의 위험, 깊은 사유의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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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정보나 동영상 강의의 치명적이 약점은… 그것을 바탕으로 뇌를 굴려 연상하거나 유추할 이유도 없다. 입력되는 정보는 많은데 그것을 처리할 시간은 짧아지고, 다양한 정보가 들어와도 자신만의 관점으로 해석할 능력이 점점 없어진다.
⇒ 너무나도 많은 정보가 여기저기에, 짧은 시간 안에 주어지는 디지털 정보들… 그래서 고등학생 때보다 대학생 때 더 공부하기 어려웠던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10분 공부 후 딴짓, 10분 공부 후 sns…의 반복 → ‘밤 새서 하면되겠지’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 하얀 화면 내에 오로지 내가 집중하고 생각해야할 정보만 있다는 것이 꽤 중요한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노션에 메모하면 참 집중이 잘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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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읽기란 자신이 터득한 삶의 지혜와 책속 저자의 생각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기존 지식과 새 지식을 연결해 나만의 생각과 관점을 꽃 피워 나다움을 만드는 작업이다. 그래서 깊이 읽는 사람은 쉽게 … 공감능력도 커진다.
⇒ 요즘 청소년들의 공감능력이 부족하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공감능력이 ‘깊은 사유’와 충분히 연결될 수 있는 문제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감한다는 것도, 천천히, 상상력을 발휘해 타인의 입장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한 생각 자체를 할 능력을 박탈당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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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엔진을 열면 찾으려 했던 정보를 찾기도 전에 방해꾼들의 공격이 시작된다. 너무 많은 정보가 입력되지만 그걸 해석하거나 의미를 반추할 시간은 없다.
⇒ 궁금한게 생기면, 생각하지 않고 바로 구글, 네이버에 검색하는 습관이 언제부턴가 별로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다. 언니와 영화를 보고 영화에 대해 비평하는 걸 좋아했었는데, 언제부턴가 감상을 말하기도 전에 ‘OOO 영화 해석’ 과같은 키워드를 검색하는 게 아쉬었던 적이 있다. 그래서 ‘생각도 해보지 않고 해석 리뷰부터 보지말라’고 말했지만, 왜 그게 안좋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쉽게 말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정답이 없는 영화에 대한 해석에서 정답을 찾고 싶지 않았는데, 검색 결과로 나온 정보들을 ‘정답’처럼 여기는 것이 아쉬웠던 것 같다. 그리고, 영화에서 인상깊었던 장면들을 하나하나 회상하면서 공감하고, 나만의 언어로 표현하고, 의미를 반추할 시간을 빼앗겼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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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뇌는 자료와 정보가 입력되면 그것을 지식으로 전환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떠도는 자료나 정보를 지식으로 숙성시키는 사색과 침묵의 시간이다. 그런데 현대인은 불특정 다수와는 자주 대화해도, 자신과는 대화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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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떤가? 어떤 정보를 새롭게 접할 때, 그것을 온전히 스스로 깊이 사색하고 정리하는가? 그런 힘들고 수고로운 과정을 거쳐야만 내 공부의 결과물이 된다.
왜 언어를 디자인해야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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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성공하는 사람은 편안한 삶에서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안전한 삶의 경계를 벗어나 낯선 곳으로 탈주하는 과정을 즐긴다. 이들은 틀에 박힌 언어가 아닌 새로운 통찰을 주는 깨달음의 언어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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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사용했던 언어와 올해의 언어가 수준이 비슷하다면, 나는 1년동안 갇혀 산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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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력을 키워야 하는 이유는, 나의 언어로 세상을 바라보고 나만의 방식으로 생각하고 표현하기 위해서다. 이 말을 뒤집으면 나의 언어가 없는 사람은 남의 언어로 바라보고 남의 방식으로 생각하고 표현할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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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언어를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생각이 바뀌고, 우리는 실제로 그 생각대로 행동한다. 자기다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기만의 색깔을 드러내기 위해 어떤 언어를 쓸지 심사숙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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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자세이자 태도이고, 그러므로 시선의 높이와 관점을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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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은 언어라는 다리를 건너야 비로소 세상으로 나오고 다른 사람에게 전달된다. 타성에 젖은 생각을 흔들어 깨우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사용하는 언어를 바꾸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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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모토 바나나는 이렇게 말한다. “어렴풋이 알고 있는 것을 누군가 언어로 분명하게 말해주면 이렇듯 마음이 편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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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지 ‘동행의 언어보다 동원의 언어만 남으면서’ 공동체 내에서의 인간관계도 무너지고 있다. ‘동행의 언어’는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의 마음으로 주고받는 언어다. 반면 ‘동원의 언어’는 상대보다 나를 내세우고, 상대의 치명적인 약점을 건드려 상처를 내려는 언어다.동원의 언어는 같은 공동체 사람들이 쉽게, 즉흥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자극적인 언어다.
→ 특히 업무 커뮤니케이션에서는 효율성을 가장 중요시 하기 마련이라, 여기서말하는 ‘동원의 언어’를 주로 사용하고 , 이런 언어에 익숙해지게 되는 것 같다. 이 구절을 읽으며 내가 그동안 업무 상 소통할 때 사용하던 말투와 어조에 대해 돌아보게 되었다.
개념이 부족한데 좋은 어른이 될 수 있을까?
- 언어가 부족하면 좋은 어른이 될 수 없다. 언어의 품격이 나의 품격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 한번도 읽어보지 못한 새로운 개념의 세계로 진입해야 부족한 개념을 보충할 수 있다. 내가 사용하는 개념의 한계가 곧 내 세계의 한계라는 뜻이다.
- 아이와 어른의 차이는 사용하는 개념의 차이이고, 어른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은 ‘개념의 성숙’이다. 살다보면 수많은 개념이 우리에게 다가와 우연히 꽂힌다. 그 개념들은 성숙과 숙성을 거쳐야만 신념이 된다. 내가 의도적으로 포착해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떠도는 관념은 그저 떠도는 관념에 그친다는 뜻이다.
- 자신만의 성숙한 사고체계를 격이 다른 언어로 표현할 때, 우리는 그가 어른답다고 느낀다. 당연히 그가 미치는 영향력도 다르다. 세상에 육체적 어른은 많아도 정신적 어른이 드문 이유는, 그들이 구사하는 언어력의 차이 때문이다. → 우리가 말하는 “어른”은 ‘정신적 어른’. = 성숙한 인격뿐 아니라, 성숙한 사고체계를 성숙한 언어로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다. 가끔 미성숙한 말을 툭툭 내뱉는 (육체적)어른을 ‘인간답다’라고 포장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은데, 그럴 순있지만 어떤면에선 주의해야할 것 같기도…
9장 전까지는 독서와 언어, 어른에 대한 내용이 깊이 공감되고 깨달음을 준 부분이 많았으나 이 이후로는 ‘연상사전’, ‘개념사전’, 등을 만들어야한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특별히 공감되지 않는데다 저자의 비유, 은유, 말장난이 너무 많아서 아쉬웠다. 순수 우리말을 굳이 둘로 나누어 자기만의 의미 부여를 한다든지, 자기만의 비유를 너무 나열한 탓에 자신의 창의성을 과시하는 느낌을 받았다.